AI 시대, 조직문화의 새로운 방향
기술이 사람의 일을 빠르게 대체해가는 시기, 조직문화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한 수중촬영감독의 삶에서 발견한 세 가지 원칙으로 그 방향을 살핀다.
어느 수중촬영감독의 삶에서 발견한
세 가지 원칙
(전문)
(본문)
춘천의 작은 술집, 늦은 밤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과 시작된 대화는 필자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고졸 엔지니어에서 외국계 기업의 기획홍보팀 차장을 거쳐, 이제는 대한민국 대표 예능과 드라마의 수중촬영을 책임지는 이일형 감독. 그는 통상적인 경력 사다리, 그것도 꽤나 안정적인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찬 특이한 이력의 사내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필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언뜻 보기에 그의 이야기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는 결이 달라 보일 수 있었다. 그는 견고했던 ‘안전지대[Comfort Zone]’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반면, 우리는 AI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안전지대 자체가 소멸하는 시대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도전이 ‘선택’의 문제였다면, 우리의 도전은 ‘생존’의 문제가 됐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더욱 강력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선택적으로 도전해야 했던 시대에, 우리 모두가 상시적으로 도전을 마주할 시대를 위한 생존 원칙을 온몸으로 체득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며, 또한 현재 더욱 중요해진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는 명확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의 여정에서 발견한, AI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한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원칙 1. 안전의 재정의 : ‘성벽’에서 ‘캠프’로
AI시대에 적응하고 싶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인 경우가 있다. 아디 프렌켄버그 (Adi Frenkenberg)과 가이 호크만 (Guy Hochman)의 2025년 학술논문인 "It's Scary to Use It, It's Scary to Refuse It: The Psychological Dimensions of AI Adoption—Anxiety, Motives, and Dependency"에서는 미래의 혼란에 대한 두려움인 예측 불안 (Anticipatory Anxiety)과 인간의 정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실존적 위협에서 비롯되는 소멸 불안 (Annihilation Anxiety)이 AI 도입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방해하기도 한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
AI가 드리운 그림자는 사실 여러 층위의 공포를 자아낸다. 앞서 두 학자가 제시한 연구결과에서 나오듯이 개인에게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실존적 불안을, 조직에게는 기존의 성공 공식이 무너질 수 있다는 구조적 위협을 안겨준다. 나아가 공동체의 존재 가치마저 희미해질 수 있다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업무 방식을 배우는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뚯하는 학습 불안 (Learning Anxiety)이 앞서 소멸 불안과 같은 생존 불안보다 큰 상태가 되면 개인과 집단은 변화를 포기하거나, 저항하게 된다(Edgar H. Schein, 2017). 즉 AI가 일으키는 변화들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실제 해야 할, 혹은 시도해야 할 도전을 막고, 조만간 없어질 안전지대(Comfort)에 머무르게 만드는, 익숙한 ‘성곽’ 안으로 숨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성곽’이 적어도 당분간은, 혹은 가장 마지막까지 유지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일형 감독은 어땠을까? 안정적인 외국계 기업 차장에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수중촬영감독으로. 이력과 평판이 전무한 영역에 뛰어들었을 때, 실패의 가능성이 명백한 그 길을 선택한 과정에서 필연적이었을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두려움을 극복은 안 했습니다. 저도 똑같은 사람이라 (당시에도) 두려움은 느꼈을 거고, 지금도 느낍니다. 하지만 두렵다고 행동하지 않는 그런 성향은 아니라서… 일단 해보자. 못하는 거는 정말 용납을 못 하겠다. 이런 마인드였어요.”
그의 대답은 단순히 한 개인의 회고를 넘어, AI 시대가 야기하는 거대한 불안감에 맞서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이는 조직과 개인이 추구해야 할 ‘안전’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얘기하는데, 실패를 원천 차단하는 ‘성곽[Fortress]’이 아니라, 도전을 장려하고 실패로부터 배우는 ‘베이스캠프[Basecamp]’서의 안전을 추구해야 함을 설명한다.
이 베이스캠프의 핵심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의 제도화다. 감독이 국내기업에서 역시 나름 안정적인 엔지니어로 일할 때에도, 고졸 학력의 한계를 느끼고 야간 대학에 진학했으며, 이후 영업팀의 사원으로 일할 때에는 새벽에 컴퓨터 학원, 영어 학원 등을 다니며 스스로를 단련시켰다고 한다. 그는 단 한순간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학습과 성장에 대한 강한 결핍감과 이에 대한 충족에 집중했다. 그에게 있어 현재의 직장, 직업은 성곽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이 더 학습하고 성장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지 안내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두려움은 새로운 시도가 실패할 수 있다는 두려움임은 분명했으나, 그러한 학습불안보다는 성장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 나아가 스스로의 잠재력에 대한 강한 확신이 학습불안보다 컸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성장마인드셋이 한 개인이 아니라, 조직문화의 정서로 자리잡아야 한다. 조직은 결과를 넘어 노력과 학습 과정을 인정하고, 리더가 먼저 실패를 공유하며 지식 창출을 장려함으로써, 구성원 모두가 ‘도전은 곧 성장’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이젠 정말로 성장 중심 조직, 의도적 개발 조직(Deliberately Developmental Organization)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둘째,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의 확보다. 사람마다 AI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도 있을 것이며, AI를 다루는데 능숙하지 못하고, 제한된 몇 몇 기능만을 쓰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또한 야심차게 AI를 본인들의 업무도구로 써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초기에는 당연히 여러 오류나 장애, 익숙하지 않은 업무환경과 흐름 탓에 이전보다 못한 업무능률을 경험할 수도 있다. 소위 말해, ‘실수’와 ‘실패’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이 지점에서 베이스캠프로서의 ‘안전’이 중요해진다. 질문하고 실수해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AI에 이제 막 발을 들이는 이들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혹은 AI 기반의 업무방식을 구현해 보겠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그러한 시도 자체를 학습과 성장의 개념으로 받아 들여준다는 ‘안전감’이 있어야,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
AI 시대의 첫 번째 사명은 다음과 같다. 조직은 이제 실패 없는 ‘성곽’이 아닌, 담대한 도전을 위한 ‘심리적 베이스캠프’를 구축해야 한다.
원칙 2. 관계의 재설계: ‘고용’에서 ‘성장 동맹’으로
AI 시대, 조직과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먼저 그의 가장 극적인 커리어 전환의 동력을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했던 독일계 기업 ‘소낙스[Sonax]’의 기획홍보팀 시절, 그는 전 세계 박람회를 누비며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는 인재였다. 고졸 엔지니어로 출발한 그가 기획홍보팀의 차장이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과 발전이라 볼 수 있고, 나름 현재의 화려한 삶에 만족감을 느끼며 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소진되고 있었다. 커리어의 정점에서 그는 ‘이것이 진정한 성공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바로 아버지의 암 투병과 갑작스러운 자신의 사고였다. 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쇠약해질 텐데 지금의 컨디션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지, 과연 무엇이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인지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그 해답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찾게 됐다. 명절날 돌아가셨음에도 장례식장을 찾아준 많은 이들을 보며, 다른 것을 많이 놓치거나 못 가졌더라도 사람만큼은 가졌다는 생각과 함께, 화려한 명함과 재무적 성과가 아닌, ‘사람’과 ‘주관적 행복’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자산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의 고백은 AI 시대에 ‘커리어 성공’의 정의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과거의 성공이 ‘하나의 조직에서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가(고용 안정성)’였다면, 새로운 시대의 성공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누구와 함께하는가(관계 자본과 주관적 성장감)’로 이동하고 있다. AI시대의 가장 대표적 특징이라면 고용안정성을 보장하는 수직적 사디리의 불확실성인데, 조직은 더 이상 ‘평생의 안정’이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개인을 붙잡을 수 없음을 말한다. 또한 개인도 더 이상 조직이 아닌, ‘나’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깊고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특정 사다리로서의 ‘나’가 아니라 ‘나’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커리어가 끊임없이 이동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당연시 여기며, 심지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직은 개인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링크드인[LinkedIn] 창업자 리드 호프먼[Reid Hoffman]이 제안한 ‘투어 오브 듀티[Tour of Duty]’ 모델이 새로운 관계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는 고용을 영속적인 계약이 아닌, 명확한 임무와 기간을 가진 ‘성장 동맹[The Alliance]’ 관계로 재정의한다.
이 모델에서 조직은 구성원의 성장에 현실적인 투자를 약속하고, 구성원은 정해진 기간 동안 조직의 미션에 헌신적으로 기여한다. 이일형 감독이 국내 한 보일러 기업에서 소낙스를 거치며 영업, 매장 관리, 기획홍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과 조직을 함께 성장시킨 여정은, 수직-선형적인 사다리형 커리어가 아닌 ‘정글짐(Career Jungle Gym)’ 커리어이자 비공식적인 ‘투어 오브 듀티’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동맹 관계는 ‘안정성’이라는 낡은 약속을 ‘투명하고 정직한 상호 성장’이라는 새로운 약속으로 대체한다. 불확실성은 더 이상 불안의 원천이 아니라, '명확한 임무’에 대한 집중과 성장에 대한 기대로 전환된다. 리더는 지시자가 아닌, 구성원의 성장을 돕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서번트 리더(Servant Leader)로서 이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AI 시대의 두 번째 사명: 조직은 ‘평생 고용’을 약속하는 대신, ‘상호 성장'을 목표로 하는 투명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원칙 3. 빠른 시도와 실험, 그리고 진전감
마지막으로 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변화를 시도하다가 초기의 실패에 부딪혔을 때 대부분의 사람과 조직은 왜 포기하고 마는가. 현실에서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과거의 ‘안전지대’라는 환상 속으로 왜 다시 돌아가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일전에 수중 교량 감리 업무를 도전한 일화를 말해줬는데, 수중촬영을 할 수 있는 자신이, 감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이러한 사업도 꽤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겠다 생각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한 달만에 포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결코 ‘실패’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역량한계, 학습분야에 대한 흥미차이, 감리사 업무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말했다. ‘100%의 실패란 없으며, 1%라도 얻는 것, 남는 것’이 있기에 모든 시도는 실패가 아니며,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정말로 성공하고 싶은 분야라면 오히려 그렇게 얻는 1%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철학은 모든 시도를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아닌, 가설을 검증하고 배우는 ‘실험'으로 간주하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AI모델의 발전속도, 모델에 따라 파생되는 다양한 개발도구, 그 것들에 의해 창출되는 무지막지한 양의 정보 홍수와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들, 이를 바탕으로 한 폭발적 변화들은 기업을 점점 더 민첩하고 유연하며, 빠르게 바꿔가고 있다.
기업 내부의 조직과 개인도 마찬가지다. 각 개인이 자신에게 유용한 업무생산성 도구를 AI IDE(통합개발환경)를 통해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하는 시대에서는 실힘적 사고와 시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이 AI 시대에 극적인 생산성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당연히 무수히 많은 실패를 만들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학습, 축적된 지식은 다음의 시도를 더욱 나은 방향과 결과로 이끌어 준다. 중요한 것은 시도와 축적이다. 이를 장려하는 문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마음껏 업무 혁신을 위해 AI IDE로 저마다 유용한 개발도구를 만들어가는 시간을 주거나, 각자 만든 도구를 경연(헤카톤처럼)장에서 뽐내어 보는 기회를 정기적으로 열어보는 것, 사내 클라우드에 각자 만든 도구를 올리고 활용하거나 다운로드받은 기록을 가지고 적정한 인센티브를 주는 일들이 지금 우리 안에서도 가능하다. 데이터 유출을 두려워한다면 로컬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들면 되는 문제다.
AI 시대의 세 번째 사명: 실험하고, 시도하게 만드는 것. 실패라는 어두운 장막 속에 가려진 성취한 것, 진전된 것, 깨달은 것들을 발견하고 모두의 지식으로 축적되게 만드는 조직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춘천의 작은 오뎅바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하나의 명확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일형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준 삶은, 더 이상 안전한 성곽이 존재하지 않는 ‘컴포트 존 소멸의 시대’에 필요한 생존법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그의 선구자적 여정에서 발견한 세 가지 원칙은, 이제 모든 조직이 내재화해야 할 새로운 운영 원칙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운영 원칙을 조직 전체에 보급하고 체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AI 시대 조직문화팀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심리적 베이스캠프’를 구축하여 조직의 기본 체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실패를 막는 견고한 ‘성곽’을 쌓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개인과 조직이 되기 위한 학습 및 성장욕구를 자극해야 한다.
둘째, ‘성장 동맹’이라는 새로운 인재 경영 철학을 도입해야 한다. 평생의 안정을 보장하는 낡은 고용 모델을 폐기하고, 명확한 미션을 중심으로 한 상호 성장을 약속하는 ‘동맹’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실험할 자유’ 조직과 자신의 일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검증하고 실험해 볼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실험 과정에서 획득한 지식과 노하우가 모두의 역량자산이 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결국 AI 시대의 조직문화는 더 이상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역할에 머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혁신하는 ‘적응형 조직(Adaptive Organization)’을 만드는 핵심 동력이 되어야 한다. 목적지는 새로운 ‘컴포트 존’이 아니다. 목적지는 지속적인 학습과 성장의 과정 그 자체이며, 그 위대한 과정을 설계하고 이끄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조직문화팀에게 부여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